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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uesday, December 20, 2011

[글로벌 아이] 빌 할아버지의 편지 [중앙일보]

입력 2011.12.06 00:00 / 수정 2011.12.06 00:05

김정욱 워싱턴 특파원

독자 여러분. 저는 워싱턴 인근 버지니아주에 살고 있습니다. 검은 개 ‘맥스’와 단둘이 사는 빌 할아버지가 제 옆집 이웃입니다. 70세 안팎으로 짐작되는 할아버지는 이른 아침 늘 똑같은 트레이닝복 차림으로 맥스와 함께 산책을 나갑니다. 이분이 무슨 일을 하시는지 저는 알지 못합니다. 오가다 만나면 반갑게 인사하는 정도지요. 맥스 과자를 사서 드린 적은 한번 있습니다. 빌 할아버지가 연말을 맞아 편지를 보내왔습니다. 지인들 목록에 저를 넣었나 봅니다. 편지 내용을 조금 줄여 그대로 전합니다.

 “즐거운 휴일 맞으세요. 저의 올 한 해를 정리해 봅니다.

 *일 : 지금 자리에서 13년 동안 일했지만, 올해가 가장 힘든 해였습니다. 오바마 정부가 들어서고 새로 적응해야 할 것들이 많습니다. 회사에선 새 CEO를 찾고 있습니다. 불확실한 미래 때문에 스트레스가 하나 더 늘었습니다.

 *가족 : 아버지가 올해 90을 맞으셨습니다. 아버지, 어머니 모두 병원 도움을 받아야 할 처지가 됐습니다. 그렇지만 올해는 운 좋게도 7월과 10월 두 번이나 부모님을 뵐 수 있었습니다. 제 형제들도 이런저런 문제는 있지만, 다들 건강합니다. 마지막으로 제 파트너 맥스! 몸무게는 많이 줄었지만 아직도 털이 윤기 있고 꼬리도 흔드니 괜찮습니다. 우리 둘 다 늙어서 다람쥐를 쫓는 데 시간이 더 걸린다는 것만 빼면요.

 *여행 : 올해는 대부분 일과 관련된 여행이었습니다. 시애틀, 덴버, 피닉스, 올랜도, 오클라호마. 이 중 시애틀에서 보낸 시간이 가장 좋았습니다.


 *동창회 : 대학졸업 45주년 기념 재회(reunion) 행사에 다녀왔습니다. 오랜 친구들을 만나 맥주 한잔, 그리고 소중한 추억들을 나눴습니다. 젊은 대학생이 오더니 왜 이름표를 달고 있느냐고 묻더군요. 너무 늙어서 내가 누구인지 까먹을까 봐 달고 있다고 말해주었답니다. 행복한 시간이었습니다.

 *문화 : 올해는 스미스소니언 박물관의 미술 강좌를 수강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예쁜 카드를 만들어 보내지 못하는 것 이해해 주세요. 케네디센터 무용 시리즈, 셰익스피어 극장, 워싱턴 발레 잡지를 정기 구독하는 것으로 만족했습니다.

 *추수감사절 : 올해도 성공! 칠면조 고기 116파운드, 햄 41.5파운드, 감자 75파운드를 준비했습니다. 150명가량의 집 없고 배고픈 사람들에게 대접할 수 있었습니다. 이제 제법 알려졌나 봅니다. 한 달 전부터 올해도 올 거냐고 물어옵니다. 그들이 음식을 먹는 것을 볼 때마다 우리가 얼마나 감사하며 이 세상을 살아야 하는지를 깨닫습니다. 이제 마지막 말을 전합니다. 행복한 새해 맞으세요!”

 저는 3년6개월간의 특파원 임무를 마치고 연말에 귀국합니다. 그동안 많은 사람을 만났지만, 빌 할아버지의 편지를 받고 나서야 비로소 미국 사람들의 삶, 미국 사회의 저력을 어렴풋이 알게 된 느낌입니다. 부끄럽지만 새해엔 저도 세상에 감사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 보려 합니다. 독자 여러분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김정욱 워싱턴 특파원

2 comments:

  1. 동창회 이름표이야기가 압권이네요. ^^

    새해 온 가족 건강하시고 복 많이 받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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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댓글 감사합니다.
    임진년 새해에도 할아버님 이하 모든 가족들이 건강하시고 주님의 은혜 속에 평강과 기쁨이 항상 함께 하시길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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