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D 프린터 만드는 벤처기업 시작한 '1호 예비 우주인' 고산
여전히 못구하는 게 없는 곳
미국서 본 조명기구 구하려
가게마다 돌아다녔더니
'없음 하나 만들어줄게!'
실리콘밸리에 있었으면
기업들 입주하려 줄섰을 것
교과서속 匠人들 지천에
모터 하나 필요해 가면
이게 더 좋아 컨설팅 해주고
사진만 들고 가도 쓱 보고
척 맞는 볼트 등 가져다줘
왜 3D 프린터인가
美선 3D 프린터값 하락 필통 등 직접 만들어 쓰는 '메이커 무브먼트' 등장
우주서 부품 망가졌다? 3D 프린터만 있으면 해결
세운상가는 내가 도달한 '별'
'달을 향해 쏴라, 설사 달을 비껴 가더라도 우주 어느 별에 도달할 것'…
난 우주인 되려고 했지만 그 과정서 새 목표 찾았죠
용달차가 빼곡했다. 화창했던 지난 4일 엘리베이터를 찾지 못해 5층까지 먼지 쌓인 계단을 걸어 올라갔다. 계단참 곳곳에 담배꽁초와 정체불명의 상자들이 난잡하게 널브러져 있었다. 지난 6월까지 전면 철거가 예정돼 있던 세운상가는 현재 철거 위기를 넘기고 겨우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상태다. 한 달 임차료는 30만~40만원 수준. 인근 지역과 비교하면 절반에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550호의 문을 열자 깔끔하게 정비된 최신식 사무실이 눈앞에 펼쳐졌다. 그곳에서 기자를 맞이한 사람은 '대한민국 1호 예비 우주인'이었던 고산(37)씨였다. 단순하고 깔끔한 책상 위에 놓여 있는 신형 애플 컴퓨터와 레이저로 깎아 만든 트리케라톱스 공룡 모형도 눈에 띄었다. 고씨는 "초행길엔 다들 엘리베이터를 찾지 못해요"라고 말하며 웃었다. 그는 미국에서 돌아온 2011년부터 이곳에 사무실을 얻어두고 '최첨단 기술의 집약체' 3D 프린터를 만드는 벤처사업을 시작했다. 고씨는 "뚱딴지같은 소리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겠지만, 세운상가야말로 3D 프린터를 만들 수 있는 최적의 입지"라고 말했다. "실리콘밸리에 세운상가가 있었더라면, 벤처 회사들이 서로 앞다퉈 입주하려고 난리였을 걸요."
"미국에서 본 조명기구가 하나 있었는데, 아무리 찾아도 구할 수가 없는 거예요. 찾다 찾다 세운상가에 와서 '이런 거 없나요' 하고 물었더니 '그런 건 없는데 하나 만들어 줄 수는 있다' 그러더라고요."
고씨는 그때 깨달음이 왔다고 했다. "여기는 뭔가가 없으면 만들어낼 수 있는 곳이구나. 새로운 걸 만들어 낼 수 있는 자궁(子宮) 같은 곳이구나." 어딜 가도 구하지 못하는 물건은 세운상가에서 만들어 쓰다가, 아예 사무실을 이곳에 얻었다.
"겉모습만 보고 다들 여길 무시하지만 세운상가에선 원하는 부품을 1~2분 만에 모두 구할 수 있어요. 게다가 공구상의 '장인'들께 무료 컨설팅까지 받을 수 있죠. 모터가 필요해서 가게를 찾으면 아저씨들이 '이거 써봐, 이게 더 좋아' 하고 추천해주시거든요. 써보면 확실히 더 좋아요. 모델명을 몰라도 대충 이러이러한 데 쓸 부품이 필요하다 그러면 기가 막히게 찾아주세요." 그는 "그게 다 세운상가에 녹아들어 있는 노하우"라며 "이것만 잘 이용해도 제조 벤처가 누릴 수 있는 이점은 무궁무진하다"고 말했다.
◇하버드에서 책으로 보던 장인들, 세운상가에서 만나다"세계 어느 곳에서도 세운상가와 같은 곳은 찾아보기 힘들어요. 게다가 서울 한복판에 있잖아요. 주변에 지하철 역만 3곳이에요. 미국 장비 업체 사람들이 세운상가를 방문한 적이 있었어요. 와서 보였던 반응이 '세상에 도심 한가운데에 이런 공간이 있다니…'였어요."
고산씨에 따르면 미국에서는 오프라인에서 실제 부품을 보고 고를 수 있는 공간이 거의 없고, 있다 해도 도시 변두리에 있다. 그래서 대부분 부품을 살 땐 온라인 매장에서 주문한다. 인터넷으로 부품을 사기 위해선 자기가 사고자 하는 정확한 부품 번호를 알고 있어야 한다. 틀리면 엉뚱한 걸 받기 마련이고, 반품하고 다시 받는 과정에서 시간이 허비된다.
"벤처 하는 사람들 대개 기계 전문가가 아니에요. 볼트만 해도 종류가 수십 가지인데, 사진만 보고 맞는 부품을 찾기가 어떻게 쉽겠어요. 근데 세운상가에 사무실이 있다면 어때요? 옆방에 놀러 가는 거예요. '사장님, 여기 고정해야 하는데, 뭐가 좋나요?' 이러면 스윽 보시고, 제일 좋은 부품을 턱하고 보여주시죠. 제가 며칠을 끙끙 앓았던 문제가 단번에 해결되는 거예요. 그것도 공짜로!"
세운상가의 '장인'들은 젊은 벤처인들을 살갑게 대했다. 젊은이들이 찾아오면 크게 반긴다고 했다. "그분들은 사실은 우리 못지않은 기업가 정신을 가졌던 분들이거든요. 젊은 애들이 뭐 하겠다고 하면 기꺼이 도와주려고 그러세요. 그 노하우를 생각해보세요. 여기 노다지 아닌가요."
고씨는 이분들을 하버드 사례연구에서 먼저 접했다. 하버드에선 실제 사례를 분석하며 수업을 진행하는데, 한국의 경제성장 사례에서 1970~80년대 세운상가 사람들이 언급됐다고 했다. 그는 "교수들은 한국이 잿더미에서 급성장할 수 있었던 이유를 '동서고금의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강했던 기업가 정신'으로 설명했어요. 그 예가 세운상가 사람들이었죠." 고씨는 "하버드에선 '아, 그렇구나' 하고 넘어갔지만 여기 자리를 잡고 보니, 어라? 옆집에 계시는 사장님들이 바로 그 책에 나온 분들이시더라"고 말했다.
◇가가린 우주센터에서부터 세운상가까지
벤처의 꿈을 품게 한 건 미 항공우주국과 구글이 만든 '10주짜리 대학' 싱귤래리티였다. 고씨는 하버드대에 입학하기 전에 실리콘밸리 안에 있는 싱귤래리티 대학에서 연수했는데, 이곳에서 '10주 동안 10년 이내 10억명에게 좋은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제품을 개발하라'는 미션을 받았다. 고산씨는 "미션을 연구하면서 사업이 그저 돈을 많이 버는 데 그치는 게 아니라 '많은 사람을 더 행복하게 만들어주는 일'이란 걸 깨달았다"며 "창업하고 싶은 마음이 부풀었다"고 말했다. "미국으로 공부를 떠난 건 '사회로부터 받은 지원을 어떻게 하면 되돌려 줄 수 있을까'를 고민하기 위해서였어요. 그걸 찾았으니 훌쩍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우주에서 부품이 망가져도 3D 프린터 하나면 OK고산씨는 지금 ATEAM Ventures라는 회사를 차려 3D 프린터를 만들고 있다. 얇은 플라스틱 실을 쌓아 붙이는 방식으로 3차원 입체를 만들어 내는 기술이다. 지난달 첫 번째 시제품이 나왔고, 10월까지 양산형 모델을 완성하기 위해 바쁘게 움직이고 있다. 고씨는 3D 프린터가 인터넷 혁명에 버금가는 충격을 세상에 줄 거라고 내다봤다. "3D 프린터 가격이 1000만원에서 100만원까지 떨어지면서 누구나 마음만 먹으면 살 수 있는 물건이 됐어요. 설계도도 인터넷에 다 공개됐으니 복사·붙여넣기만 할 줄만 하면 누구나 자신이 원하는 입체 모형을 만들 수 있게 된 거죠. 지금까지는 아이디어가 실제 제품으로 나올 때까지 많은 품이 들어야 했지만, 이젠 클릭 몇 번에 만들 수 있는 겁니다." 미국에서는 이미 필통·컵과 같은 10달러 미만의 생활용품을 자신의 아이디어로 직접 만드는 운동인 '메이커 무브먼트'가 새로운 화두로 등장했다. 그와 동시에 값싼 중국제 생활용품들이 설 곳을 잃어가고 있다.
전직 예비 우주인 고씨는 3D 프린터가 우주선 안에 탑재된다면 우주인들의 생활도 크게 달라질 것으로 예측했다. 우주에서 부품이 고장 나면 생명이 위험하다. 하지만 우주로 가져갈 수 있는 물건은 몇 개 안 돼 예비 부품도 몇 종류 없다. 그래서 우주정거장에서 부품 하나가 고장 나면 다음 도킹 때까지 무작정 기다려야 한다. "모든 부품을 다 싸갖고 올라갈 수 없으니까, 모든 부품을 만들 수 있는 3D 프린터와 원료를 갖고 가면 됩니다."
◇우주인이 접한 세계, 애국심에 불을 지피다고산씨는 인터뷰 도중에 '사회적 책임'에 대한 말을 많이 했다. 자신이 400억원이 넘는 세금으로 우주인 교육을 받은 데다, 한국에 돌아온 뒤로도 강연을 다닐 수 있었던 건 그 교육을 받았기 때문이라고 했다. 원래부터 애국심이 투철한 사람이었냐고 묻자 손사래를 쳤다. "'한국 사람이다' 이런 게 없었어요. 그러다 우주인으로 뽑혀 러시아에 한국 대표로 나갔는데, 고산이란 자연인은 대한민국 없이는 존재할 수 없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죠."
우주인으로 뽑혀 훈련을 받던 2007년 여름 우크라이나 얄타에서 경험한 사건이 결정적 계기가 됐다. "바다로 떨어질 경우를 대비한 훈련이었는데, 거기엔 러시아의 마지막 로마노프 왕조의 별장이 있었어요. 우리나라의 허리를 반 토막 내게 한 얄타회담이 열린 곳이죠. 안에 들어가 보니 탁자에 아직도 스탈린과 루스벨트의 명패가 있더군요. 그걸 보면서 '나라의 힘이 없으면, 이렇게 낯선 장소에서 우리의 의사와는 무관하게 남북이 갈리게 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같이 훈련 간 우주인들은 모두 미국과 러시아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그 탁자 앞에서 기념사진을 연방 찍었지만, 고씨는 기념사진 한 장 남기지 못했다.
인터뷰를 준비하며 고씨와 이메일을 주고받았다. 고씨의 메일 하단에는 언제나 '달을 향해 쏴라. 설사 달을 비껴 가더라도 우주의 어느 별에 도달할 것이다'란 문구가 있었다. 고씨에게 "'대한민국 최초의 우주인'이란 달을 향해 달려갔는데, 지금 도착한 별은 세운상가인 건가"라고 물었다. 고씨는 한참을 고민하다 입을 뗐다. "목표에 도달 못 해도 시도가 의미 있는 건, 그 과정에서 또 다른 목표를 볼 수 있기 때문이에요. 전 우주인이 되고 싶어 그 길을 걸었지만, 그 과정에서 제가 사회에 가치를 더하는 일을 하고 싶어한다는 걸 깨달았어요. 새로운 목표, 새로운 달이죠. 그래서 지금 도달한 세운상가에서 새로운 목표에 도달하기 위해 발사대를 열심히 만들고 있어요. 그런 면에서 보면 세운상가는 제가 지금 도달한 별이 맞네요."
chosun.com 엄보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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