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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turday, June 11, 2011

'재즈콘서트 100회' 가수 윤희정

"재즈가 내게 말했다… '넘버 원'보다 '온리 원'되라고"

15년째 개최 매회 매진 행렬… 기업인·판검사… 유명인 무대 세워
전국노래자랑 1등하고 '금의환향'… 큰오빠 고등고시 합격이 묻힐 정도
부모님 얘기 담은 '윤희정 블루스'… 꽹과리 장단에 부를 때 눈물이…
성공한 여자 열의 아홉은 '여장부'다. 열정과 자신감으로 똘똘 뭉쳐 상대를 압도한다. '입'도 걸쭉하다. 재즈가수 윤희정(58)이 딱 그랬다. "내가 A형이라 소심하고 지랄 맞지." 오지랖도 넓다. "(기사에) 나 머리 나쁜 사람이라고 꼭 써주세요. 열정과 희망 덩어리라고 하는 건 뭐, 괜찮아요." 그녀의 솔직함이 좋았다. "내가 재즈를 잘하는 가수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재즈는 어렵고 내 능력은 모자랐으니까. 그래서 내게 재즈는 열정이 아니라 연민, 그리움이고 안타까움이죠."

1997년 서울 정동극장에서 막을 올린 재즈콘서트 '윤희정과 프렌즈'가 지난달로 100회를 맞았다. 재즈에 관한 한 척박한 한국에서 매회 매진행렬을 이어가며 15년을 버텨온 기록적인 공연이다. 100회 공연을 기념해 윤희정은 재즈에세이 '이 노래 아세요?'(나비)를 펴냈다. 해박한 지식과 입담으로 풀어놓은 재즈 50곡, 곡마다 공연 동영상이 QR코드로 수록된 독특한 책이다.

누구는 그를 '재즈의 여왕'이라고 부르지만 윤희정은 '엔터테이너'라는 수식이 더 어울렸다. 6일 반포동 작업실에서 만난 그녀가 가장 많이 한 말이 "쇼 머스트 고 온(Show must go on)"이었다.

◆소프라노? 난 재즈의 여왕

―재즈는 몰라도, 윤희정을 아는 사람은 많다. 윤희정이란 이름은 몰라도 포스터 보고 '아, 저 여자!' 하는 사람들은 더 많다.

"10년 전에는 날 보고 '소프라노?' 했는데, 요즘엔 단박에 '재즈죠?' 한다. 내가 커피숍 가면 클래식이던 음악이 조금 있다 재즈로 바뀐다. 재즈의 저변이 넓어진 거다."

―올림머리, 화려한 드레스, 우람한 풍채가 트레이드마크다.

"빌리 할리데이는 평생 머리 한쪽에 하얀 꽃을 꽂고 노래했다. 공연 직전에 실수로 한쪽 머리를 태웠는데 그걸 감추려고 아무 꽃이나 꽂게 된 게 시작이었지. 가수라면 자기만의 스타일을 만들어야 한다."

―매일 매일 이브닝드레스 입고 와인만 마시며 살 것 같다.

"밥 짓고 빨래하면서 익힌 노래 실력이다.(웃음) 내가 제일 좋아하는 게 시장 구경이다. 사고팔고, 흥정하다 싸우고. 나는 애들은 돌 되기 전부터 시장에 데리고 다녀야 한다는 주의다. 음식도 잘한다. 날 닮아 우리 아들이 요리사 되지 않았나. 6년 동안 공부하던 전자공학 때려치워 나한테 욕 엄청 먹었다."

―누가 봐도 괄괄한 여걸인데, 소심한 여자라고 주장하신다.

"내가 쓰고 다니는 모자가 100개가 넘는데, 모두 내가 뜬 거다. 소심하지 않고선 할 수 없는 짓이지. 예민해서 상처도 잘 받는다. 장점이라면 끝을 보는 거! 깔고 뭉개는 한이 있어도 끈질기게 가는 타입이라 지금까지 재즈를 부르고 있는 거다."

―100회를 맞은 '윤희정과 프렌즈'는 처음 어떻게 시작된 건가.

"97년 정동극장 극장장이던 홍사종씨가 프러포즈해왔다. 수익금의 6할을 주겠다면서. 재즈를 한 달에 한 번 상설로 어찌하나 싶어 '못한다' 하고 도망쳤는데, 은사인 이판근 선생이 엄청 야단치시더라. '해보겠다'고 다시 찾아갔는데 그 사이 내 몫이 4할로 바뀌었더라. 기회를 놓친 비용이지. 하하!"

◆쇼는 계속되어야 한다


▲ '윤희정과 프렌즈'무대에 오른 배우 송일국이 탭댄스를 추고 있다. / AYE스튜디오 제공―한장에 5만원짜리 티켓인데, 거의 매회 매진을 기록했다. 비결이 뭘까.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쇼 머스트 고 온(Show must go on)' 해온 거. 국상(노무현·김대중 대통령)이 두 번이나 있었는데도 우리 공연은 계속됐다. 그때는 드레스를 블랙으로 바꾸고 소로(sorrow·슬픔)풍의 애잔한 곡들로 레퍼토리를 바꿨다."

―'프렌즈'에 해당하는 유명인사들의 출연 덕분 아닐까.

"재즈의 저변을 넓히려는 의도였다. '김건모가 재즈를 해? 박정자가? 송일국이?' 하면서 오시더라. 프렌즈 240명 중 절반은 기업인이나 책벌레 학자들이었다. 노래에 대한 저마다의 로망을 무대에서 펼칠 때 내 심장이 다 쿵쾅거리더라."

―박경림도 무대에 섰다.

"그 음색에 맞는 재즈가 의외로 많다. 개성 있는 게 훨씬 유리하다. 또 박경림 소리가 은근히 많이 올라간다. 안 올라갈 데도 올라가서 애를 먹었지."

―음치도 재즈 할 수 있나?

"자기가 음치라고 하는 사람 중에 진짜 음치를 본 적이 없다."

―'프렌즈'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사람.

"송인준 당시 헌법재판소 재판관. 처음엔 단호히 거절하셨다. 그분이 시인이라기에 '이후'라는 시집을 사서 밤새 읽은 뒤 '들국화'란 시에 곡을 붙여 다시 전화 드렸지. 저 여자가 보통이 아니구나, 생각했는지 수락하시더라. '마이웨이'와 '떠나가는 배'를 재즈로 편곡해 부르셨는데, 정말 귀티 나는 무대였다."

―연예인은 물론 기업인, 국회의원, 판검사까지 240여명이 출연했다. 굉장한 마당발이다.

"마당발 아니다. 그달의 무대에 가장 잘 어울릴 사람, 존재감이 있는 주인공을 늘 물색한다. 먼저 출연했던 분들이 추천도 해주시고. 안면이 전혀 없는 분들은 무조건 114로 걸었다."

―일종의 스타 마케팅이다.

"연예인이 나오면 나쁜 건가? 내가 공연을 위해 얼마나 노력했느냐면, 세 번째 곡에서 화장실 가는 관객이 발견되면 다음 공연에서는 그 곡을 여섯 번째로 옮겨놓고 관객의 반응을 살폈다. 한 회에 18곡을 연주하고, 1년에 190곡을 무대에 올리는 셈인데, 같은 레퍼토리가 거의 없었다."

◆박사 집안에 '노래하는 청개구리'

―1972년 '전국노래자랑'으로 가요계에 입문했다.

"송해씨가 진행하는 '전국노래자랑'과는 전혀 다른 프로였다. 요즘으로 치면 '위대한 탄생' 같은 거지. '세노야, 세노야' 불러서 그랑프리 먹었고, KBS 전속 가수가 됐다. 그 당시 서울법대 다니던 오빠(김병준 변호사)가 고등고시에 붙었는데, 내가 그랑프리 먹는 바람에 오빠의 성취가 완전히 묻혔지. 20인치 텔레비전, 전축, 라디오를 경품으로 타서 삼륜차에 싣고 금의환향했으니!"

―6남매 중 윤희정만 빼고 다 '박사학위' 소지자라고 들었다.

"이북서 피란 나온 부모님이 억척스럽게 자식교육 시키셨지. 아버지가 내 통기타를 세 번이나 때려 부쉈다. 나야말로 책상머리에 앉아 공부만 하는 오빠, 동생들을 이해할 수 없더라. 공부가 얼마나 좋으면 애를 배서, 또 갓난애를 둘러업고 유학들을 가겠나. 내 눈엔 인간으로 안 보이더라."

―그런데 노래 잘하는 재능은 아버지에게서 물려받았다.

"우리 아버지 톤컬러 최고였지. '눈보라가 휘날리던 바람 찬 흥남부두에…' 하시면 집안이 쩡쩡 울렸다. 탁탁 튀는 스윙감, 대단했다. 아버지가 '대동양행'이라고 전자제품 총대리점 같은 걸 하셨는데, 내가 아버지를 시험하려고 저 뒷구석에 놓인 라디오를 틀어놓으면 '야, 일곱 번째 라디오 끄라우!' 하셨다. 귀가 그리 영특하셨지. 근데 그걸 자식이 하는 건 싫은 거였다. 내가 우리 아들 요리사 된 게 싫었듯이."

―통기타는 누구한테 배웠나.

"독학했다. 내 본명이 김명희인데, 반편성할 때 김명희랑 같은 반 되면 애들이 무지하게 좋아했다. 재미난 노래 많이 가르쳐주니까. 이금림 작가 아시나? 그분이 국어선생 하실 때 첫 부임지가 우리 학교였는데, 내가 '선라이즈 선셋' '하얀 손수건' 같은 노래 한 곡 불러드려야 수업 시작했다. 학교 공터에서 애들한테 종이에 그린 돈 100원씩 받아서 리사이틀하고 그랬다."

―전국노래자랑에서 1등 했더니 아버지가 자랑스러워하시던가.

"물론이다. 솔직히 늙으신 부모 곁 지킨 것은 청개구리였던 나다. 다들 공부한다고 외국으로 떠났으니. 공부 열심히 해야 교수밖에 더 되나? 하하!"



▲ 윤희정의 에너지는 대단했다. 카메라를 들이대자 즉석에서 마이크를 잡고 무대에서와 똑같이 재즈를 열창다. "즉흥적인 변화가 예고 없이 일어나는 재즈, 그래서 어렵고 짜릿한 이 음악이 나를 미치게 만들죠." 서울 반포동 그녀의 작업실은 '윤희정과 프렌즈'공연에 참가한240명의 스타를 '재즈가수' 로 키워낸 산실이다. / 이태경 기자 ecaro@chosun.com◆'넘버 원'이 아니라, '온리 원'

―그랑프리 수상 후 가스펠 가수로 활동하다 92년 재즈에 입문했다.

"스물세 살에 결혼했고, 크리스천이라 가스펠 부르며 해외선교를 많이 다녔다. 그런데 뭔가 공허하더라. 뭐가 더 있을 것 같은데 그게 뭔지 모르겠더라. 그때 어떤 분이 나를 이판근 선생에게 소개해줬다. '한국 재즈의 대통령' 아니신가. 그 집에 들어서는데 '도'도 아니고 '레'도 아닌 오묘한 사운드가 가슴팍에 꽂히는 게 나의 공허함을 순식간에 채워줬다. 인사를 드리니, '부잣집 맏며느리 같은 분이 왜 거적을 쓰려고 해?' 한다. 기분이 딱 나쁜 게 오기가 발동했지. 그때부터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재즈에 매달린 세월이 20년이다."

―책에 '나는 재즈를 잘하는 가수라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쓰셨다.

"좀 알겠다 싶으면 저만치 도망가는 게 재즈다. 아무리 노력해도 안 되는 게 있더라. 재즈의 전설로 불리는 보컬들을 똑같이 흉내 내보려고도 수없이 노력했다. 사라 본의 바다 속 같은 울림…. 사라가 1950년대에 부른 '미스티(Misty)' 들어봐라. 기가 막힌다. 빌리 홀리데이가 무덤에서 튀어나온 것처럼 해보려고 했는데도 안 되더라. 그 허무와 지독한 사랑을 표현하기 참말 어렵더라."

―재즈가 그렇게 어려운가.

"최고를 추구하니까 어려웠겠지. 좀 더 일찍 만났더라면 하는 아쉬움도 크다. 재즈를 만난 게 서른여덟 살 때이니. 20대에 재즈를 만났더라면 세상을 뒤흔들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있다. 정말!"

―재즈를 처음 배운 이후 연습과 공부를 중단해본 적 없다던데.

"어느 뮤지션이 그랬지. 하루 연습을 안 하면 내가 알고, 이틀을 안 하면 관객이 알고, 삼일을 안 하면 재즈를 그만둬야 한다고. 가수지만 악기를 다룰 줄 알면 음악의 영역과 리듬감이 발전한다고 해서 꽹과리부터 콩가, 카바사, 셰이커 같은 악기들을 섭렵했다."

―스스로 '된장재즈'라는 애칭을 붙인 창작재즈에 대한 애착은 그런 노력들 끝에 생긴 건가.

"나라마다 서로 다른 색깔의 재즈가 있듯이 한국재즈를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판근 선생의 뜻이기도 해서 그분의 창작재즈를 내가 많이 불렀고 앨범도 냈다. 셔플에 우리의 중중모리를 섞은 '셔플모리'가 대표적이다. 100회 공연 때 돌아가신 아버지, 그리고 병상에서 오늘내일 하고 계신 어머니에게 바친 'YHJ 블루스'는 재즈 20년 인생에 얻은 윤희정의 블루스다. 내 이야기, 북녘에 고향을 두고 오신 부모님 이야기를 담은 '명곡'을 꽹과리 장단에 부르면서 솟구치는 울음 참느라 힘들었다."

―재즈와 인생은 어떻게 닮아 있나.

"재즈는 누가 부르느냐에 따라 천차만별의 색깔이 된다. 그래서 재즈는 '넘버원'이 아니라 '온리 원(only one)'이 되라고 격려한다. 재즈와 사랑하고 싸우고 연민하면서 내가 깨달은 것도 그것이다. 물론 어렵지. 포기하고 싶을 때 많지. 하지만 흉내 낼지언정 지독히 따라 하고 노력하다 보면 어느 순간 내 것이 나타난다. 인생은 결국 살아남은 자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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