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p

Tuesday, February 22, 2011

[최보식이 만난 사람] '어린이재단' 후원회장 30년, 배우 최불암

입력 : 2011.02.20 23:21 / 수정 : 2011.02.21 09:43
"늙어도 욕망은 있어… 다만 어려운 절제를 해온 것일 뿐"
길거리 아이 입양한 '전원일기' 드라마에 시청자 칭찬 쏟아져
난 연기 했을 뿐인데… 내가 위선적이란 자성에 불우아동들 후원
최불암(71)씨는 원숙한 배우로만 알고 있는데, '초록우산 어린이재단'에서 "우리 단체 후원회장을 맡은 지 30년이 됐다"고 알려왔다. 이 재단은 불우아동을 위한 후원기관이다.

내 경우에는 세상에 가장 어려운 게 아버지 노릇인데, '대표 아버지'인 그를 직접 만날 인연도 있구나 내심 생각했다. 이 자리를 만들어준 '어린이재단 후원회장 30년'에 대해 묻기도 전에 그가 먼저 입을 열었다.

▲ 최불암씨는 “세상엔 공것이 없고 누가 더 행복하고 불행한지 모호하다”고 말했다. / 오종찬 기자 ojc1979@chosun.com

“1981년이었어요. 농기구를 사러 시장에 갔는데 모퉁이에 ‘금동이’가 앉아 동냥하고 있었어요. 그냥 지나치는데 발걸음이 안 옮겨지더라. ‘내 얼굴을 봐주세요’ 그런 느낌이 들었죠. 뒤돌아서 1천원을 주려다가, ‘너 우리 집에 갈래? 가서 씻고서는 더 맛있는 것도 먹을 수 있고 형(兄)아가 입던 옷도 있다’고 했어요. 아이가 내 뒤를 멀찍이 따라왔어요. 동네 어귀서 사람들이 ‘누구냐?’ ‘김 회장이 바깥에서 낳은 애를 데려오는가 보다’ 숙덕거렸어요. 소문이 나니 어머니가 걱정하셨지요. 내 설명을 듣고서는 ‘우리 애들은 다 컸으니 그 아이를 입적해 기르면 어때’라고 하시는 거예요.”

‘실제 상황’을 한참 듣고 보니, 느낌이 이상했다.

“혹시 드라마 얘기입니까?”

그는 진지하게 말했다.

“드 라마 얘기죠. 그 회(回) ‘전원일기’가 나간 직후 전화가 폭발했어요. 처음에는 ‘히트쳤구나’ 좋아했습니다. 다음 날부터 ‘당신 훌륭하다. 어떻게 길거리 아이를 데려와 입적시키느냐’는 편지들이 배달됐어요. 점점 마음의 부담이 됐어요. 작가의 펜끝에 따라 연기를 했을 뿐인데 칭찬은 나 혼자 받으니. 나 자신이 위선적인 존재 같았죠.”

―위선적 존재라니요?

“연 기를 한 것인데 실제로 그렇게 보니…. 그런 스토리를 꾸며낸 작가가 훌륭했으면 했지. 작가의 펜끝에 노는 사람이 무슨 칭찬을 받나. 내가 그런 고민을 할 때, 누군가가 여길 소개해 줬어요. 고아원에 있는 여섯살 난 여자아이와 결연맺어 매달 1만원을 냈나, 고아원을 떠나는 열여섯살 때까지 했어요. 어쨌든 내 얼굴과 유명세가 있으니까, 후원자들을 늘려갔어요.”

―후원회장은 좋은 자리입니까?

“개인적으로 이득을 볼 게 없죠. 혹 돈 있는 사람이 인기관리 차원이라면 몰라도.”

―그런데 30년 동안이나 후원회장을 계속 맡았습니까?

“내가 움직임으로써 여러 사람이 혜택을 받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한 거죠. 그때만 해도 연예인이 이렇게 나서지 않았어요. 내가 보람을 느끼는 것은…, 후배들이 이런 일을 다 알게 됐어요. 차인표나 어느 인기인들도 하나씩 맡고 있어요. 제가 시킨 건 아닌데. 간접적으로 영향이 있었는지는 모르나….”

―서울시 홍보대사, 백신 홍보대사, 육군 홍보대사, 불암산 명예대사 등 유독 이런 감투를 많이 맡고 있는데, 나름대로 이유가 있습니까?

“에헤, 제가 개인적으로 이익을 얻는 것이 없다는 것은 다 알겠고, 공익 차원에서 관심을 줘야겠구나 마음이 있어요. 아무래도 연예인이 나서면 좀 더 눈길을 줄 수 있으니까요. 그런 요청이 오면 거절하지 않는 편입니다.”

―나이가 들면서 드라마나 영화의 ‘본업’에는 역할이 점점 줄어들지요?

“줄어듭니다. 아무래도 어떤 역을 소화해내는 열정이 덜 하지요.”

―이순재씨의 역주(力走)와는 비교됩니다.

“그 선배님을 못 쫓아갑니다. 그리고 저는 영화를 잘 안 합니다, 안방극만 했지. 텔레비전 인기로 영화관으로 나와야 했는데…. 그러면 양쪽을 다 집어먹을 것 같았어요. ‘세상 모든 떡이 다 네 떡이 아니다’고 생각했어요. 절제랄까, 영화는 안 했어요. 연극은 자기 훈련으로 가끔 했고요.”

―‘전원일기’때 쌓아놓은 ‘한국의 대표 아버지’ 타이틀을 이순재씨에게 내주는 게 아닐까요?

“선배님이 어른 역할을 하셔야죠. ‘아버지’ 타이틀을 제가 갖고 있는 것 같아 늘 선배님 뵐 때 미안해요. 뭐, 그럼에도 ‘한국의 아버지’는 제 타이틀이지요.”

―어떻게 해서 아버지 역을 자연스럽게 맡게 됐습니까?

“사 실 저는 아버지를 일곱살 때 여의었거든요. 할아버지 밑에서 자랐어요. 그래서 노역(老役)이 장기가 됐어요. 대학시절부터 했어요. 청년에서 바로 노인으로 간 거죠. 청춘물은 못 해보고. 배우를 하다 보면 남녀관계에 호기심이 가잖아요. 70년대 중반 여비서와 사랑에 빠지는 불륜 드라마를 한 편 찍으려다가 박정희 대통령한테 야단맞았어요. 그래서 중단했죠.”

―드라마가 아닌, 실제 집안에서 선생은 어떤 아버지였나요?

“세 상의 어느 아버지도 자식과는 다 갈등이 있지요. 그래도 저는 드라마 배역과는 닮았어요. 실생활에서 그 정서가 나와요. ‘전원일기’ 할 때는 TV를 보고 있으면 집사람이 ‘허리 좀 펴고 앉으시오. 김 회장처럼 앉아 있나’고 면박 줘요. 방송국에 들어갈 때도 수위가 ‘오늘 전원일기 녹화 날이군요’ 인사해요. ‘그걸 어떻게 아시오?’ 하면 ‘걸어오는 모습이 천상 김 회장이던데요’ 해요. ‘수사반장’ 녹화하는 날에는 수사반장 걸음걸이가 돼요.”

―1971년 ‘수사반장’을 처음 맡았을 때가 서른한살이었지요?

“드라마 속 수사반장은 쉰다섯살쯤 되는 역(役)이지요.”

―그 드라마도 18년간 롱런했는데, 중간에 방영이 끊긴 적 있더군요.

“80년대 초반에 범인으로 레즈비언 여교사가 나온 적이 있어요. 김옥길(金玉吉) 당시 문교부 장관이 ‘선생님 이미지를 손상했다’며 펄쩍 뛰어서 한 번 중단된 적 있었어요. 그 뒤에는 새로 취임한 방송사 사장이 ‘113수사본부’ ‘암행어사’와 ‘수사반장’을 폐지시켰어요. 5공화국에서는 반공이 잘 되어 있고 암행할 일도 없고 치안도 안정돼 있으니 이런 드라마는 더 이상 현실에 맞지 않다는 이유였죠. 몇 달 중단됐죠. 그런데 시청자들의 항의가 워낙 거세 ‘수사반장’만은 다시 하게 됐어요.”

▲ ‘수사반장’ 시절의 최불암

―젊어서 나이가 들어 보이면 대접은 받지만, 그 나이 때 즐길 수 있는 것을 못 즐기는 경우도 있었겠지요.

“그 렇지요. 오히려 나는 젊게 보이려고 노력했어요. 과거 집사람과 외출하면 사람들이 ‘보기보다 얼굴이 젊소, 옆에는 따님이오?’ 했어요. 요즘은 내 나이 칠십이라고 하면, ‘아직 그밖에 안 됐소. 옛날부터 노인이라 팔십 넘은 줄 알았다’고들 해요.”

―남의 시선 때문에 일상에서 많이 절제했겠지요. 그래도 일탈(逸脫)의 심리가 있지 않겠습니까?

“옛 날 한 선비가 술을 마시면서 ‘내 평생 아내와 살지만 난들 왜 정욕이 없을까. 다만 쓰이지 못할 뿐이지’라고 했답니다. 나도 예쁜 여자 보면 안아보고, 옆자리에 앉혀보고 싶지요. 어려운 절제가 있죠. 직업상 하면 안 되죠. 못하는 건가. 아니, 안 해야 되는 거죠. 연기자가 가장 싫어하는 게 휴대폰 카메라인데, 내가 만약 젊은 여자와 차 한잔 마시는 걸 누가 찍어서 퍼뜨리면, 하하…. 다행히 드라마에서는 그런 걸 할 수 있으니 거기서 카타르시스를 하죠. 세상에는 공것이 없어요. 누가 더 행복하고 불행한지, 어떤 의미에서는 없는 것 같아요. 가난하고 어려웠을 때가 지금에 와서는 행복했던 것 같고, 차 없이 몇십리 길을 걸었던 게 그때는 힘들었지만 이제는 그리워요.”

―굳이 ‘일탈’이 있었다면 정주영 회장의 권유로 정치판에 들어간 것인데.

“허 그렇죠. 달갑지는 않았지만. ‘자네는 전국구 4번이야 4번’ 했는데, 그때 저는 ‘전국구’라는 것도 몰랐어요. 우리 집사람은 ‘반납해라’고 했고 많이 갈등했어요. 하지만 그런 세계에 꼭 들어가고 싶어하는 게 남자의 욕망이기도 해요.”

―남자에게는 그런 권력의 욕망이 있지요.

“권력이라고는 생각지 않았지만, 구경은 한번 해볼 필요가 있지 않으냐 했어요. 전국구 임기가 끝나고 ‘영등포을’에 출마하라고 해서 나갔는데 떨어졌어요. 떨어질 줄은 알았어요. ‘최불암은 무대로 김민석은 국회로’ 참 적합한 구호였어요. 나도 공감했으니.”

―정주영 회장이 드라마를 좋아했죠. 그래서 친하게 됐나요?

“잘 아시네. 그분은 ‘전원일기’에도 출연하려고 했어요. 찍을 분량 20분을 비워놓고 기다렸는데, 오지 않았어요. ‘아침 사장단 회의에서 워낙 말려서’라고 하데요. 제게는 연기도 가르쳤어요. ‘이봐, 낫은 그렇게 들면 안 돼’ ‘쌀 한 가마를 들어 자전거에 싣던데 그렇게 들면 허리 부러져. 무릎으로 받쳐서 들어야 해’ ‘지게를 그렇게 지면 안 돼. 지게는 목으로 지는 거야. 목이 핸들이야. 목을 빼서 지는 거야’ 이분은 모든 것이 농사정신이었어요. 한번은 서산간척지를 어떻게 폐선(廢船)으로 막아 만들 생각을 했느냐고 물었더니, ‘논의 물꼬를 막으려면 젖은 지푸라기를 확 던져놓으면 돼. 그러면 이물질이 달라붙어 저절로 막혀’라고 해요.”

―한때 ‘최불암 시리즈’도 유행했지요. 어쩌다가 점잖은 선생이 허망한 시리즈의 주인공이 됐을까요?

〈최 불암이 퇴근해 아들에게 ‘독수리 5형제’를 보자고 했다. 아들은 ‘독수리 5형제’가 막을 내리고 ‘개구쟁이 스머프’가 새로 시작했다고 말했다. 그러자 최불암이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하는 말, “과연 개구쟁이 스머프가 지구를 지킬 수 있을까?”〉
“1980 년대 후반 민주화가 되면서 데모거리가 없어졌어. 그 틈바구니에서 태어났어요. 세상에 저런 아버지가 있느냐. 가부장 역할에 대한 풍자도 섞였겠지요. 이름 자체도 불암(佛岩)이니…. 당시 출판사에서 시리즈를 책으로 내겠다고 성명권(姓名權)을 줄 수 있느냐고 해요. 내가 원고를 읽어봐도 너무 재미있어요. 허락해줬더니, 매달 내 사무실로 돈 대신 양란(洋蘭)이 배달됐어요. 하하하.”

―사실 ‘전원일기’에 나오는 김 회장 같은 아버지는 현실에서 찾기 드물죠.

“등 뒤를 보이는 아버지가 아니라, 자기주장이 강한 아버지였으면 좋겠다고 언론의 비판을 받은 적이 있어요. 내가 자기주장이 없어요. 남들과 충돌도 없고 과격하게 고집하는 것도 없어요. 그래서인지 주변 선배들이 ‘너는 항상 편해’라며 술자리에 자주 불렀어요.”

―여전히 술을 좋아한다고 들었습니다(그 모친은 서울 명동서 문화인들의 사랑방 역할을 했던 대폿집 ‘은성’을 했다).

“그 다음 날 일이 없으면 좀 맛이 나죠, 하하.”

―사람이 늘 같은 모습으로 사는 것도 그러한데, 지금쯤이면 점잖은 노역만 맡는 것이 신물 나지 않습니까?

“직 업이고 그때마다 역할이 다르니 괜찮아요. 젊었을 때는 어떻게 노인처럼 손놀림을 할지 배역 분석을 했어요. 이제는 그냥 나옵니다. 굳이 연기를 안 해도 될 정도죠. 얼마 전 드라마에서는 그 배역이 내 나이였어요. 재산이 많은데 자식에게 안 물려주고 재혼해 해외로 나가서 자살하는 스토리였지요. 그런 노인의 심리를 꿰뚫어보니 너무 아프고 허망한 거요.”

―실제 늙었다는 뜻은 아니지만, 나이가 드니 기분이 어떻습니까?

“육십 칠십이 돼도 그 나이의 맛이 있는 것 같아요. 후배들에게 한마디 하면 모두 귀담아듣고, 최불암이라는 삶 자체도 정리되는 것 같고.”

―늙음을 예찬(禮讚)하는 이가 가끔 있는데 과연 솔직한 마음일까요?

“나 도 그런 의문이 들 때가 있어요. 하지만 나이가 들면 체력적으로 자연히 절제가 돼요. 완전히 절제되면 죽음이니, 늙어도 욕심은 남아 있죠. 친구끼리 술자리에서 만나면 ‘너 요즘도 여자 생각나?’ 하고 주고받아요. 아름다운 여자를 보면 아름답게 보이죠. 욕망보다 자연현상으로 보는 것이겠죠.”

No comments:

Post a Comment